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7 긴급회의 (문단 편집) === [[국공합작]]과 국공갈등 === 1924년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쑨원]]의 주도로 중국에서의 혁명을 위해 합작하게 되었다. 쑨원은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 개인자격으로 입당할 자격을 주고 공산당과 함께 [[국민혁명]]을 전개하기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1차 국공합작]]이다. 하지만 '''군소정당에 불과한 공산당원들이 국민당 내부에 깊숙이 침투하여''' 요직을 차지하고 국민당에 가입한 공산당원들의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다이지타오]]를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은 공산당이 국민당에 기생하고 있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1925년 쑨원이 사망한 후, 국공갈등은 국민당 내부의 대권 경쟁과 결합되어 더욱 심화되었고 1925년 8월 20일, 국민당 재정부장인 랴오중카이가 암살되는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왕징웨이]]와 코민테른 요원 [[미하일 보로딘]]은 이를 국민당 외교부장 [[후한민]]의 사촌동생인 후이성의 교사로 단정하고 후한민을 [[소련]]으로 강제외유를 보냈다. 이후 군정부장 쉬충즈도 [[천중밍]]과 내통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숙청되었으며 원로 [[린썬]]과 청년부장 겸 중산대학 교장 [[쩌우루]]도 화북에 국민혁명을 전파하라는 구실로 광저우에서 추방당했다. 이에 분노한 혁명원로와 국민당 우파들은 1925년 [[서산회의]]를 개최하여 상하이 당중앙을 설립, [[서산회의파]]를 조직하여 국공합작의 종식을 요구했지만 공산당과 좌파가 장악한 광저우 중앙은 2전대회를 통해 우파에 대한 제명으로 대응했다. 우파 숙청 이후, 국민당은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가 영도하고 있었고 왕징웨이의 집권을 도운 [[장제스]]가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쑨원의 유지였던 북벌을 하루빨리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공산당은 장제스의 주장이 시기상조라고 비판했고 신임 소련 고문 키산카 등은 장제스를 비판하며 도장, 반장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의 깊어지던 와중에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면서 키산카 등 장제스에게 적대적인 고문들은 자아비판 후 중국에서 추방되었고 충격을 받은 왕징웨이는 상심하여 프랑스로 외유를 떠나면서 국민당은 장제스가 영도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즉각 북벌을 추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